X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이송되어 온 포로들./ 사진=국가기록원
한국 전쟁은 일제강점기, 신탁통치 이후에 발생한 내전이었다. 구한말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한반도에 진주한 일본과 미국 모두 한국에 대한 생각은 대동소이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이 주권국으로서 자치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여기며 강제 병합했다. 그로부터 36년 후 신탁통치에 나선 미국 일각의 입장도 제국주의 일본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한국인은 독립적 사고능력이 없고, 식민 지배 세력의 제약이 없으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고 여겼다는 점에서다.
X
신탁통치 반대집회./ 사진=서울역사박물관
그러나 이런 미국의 평가와는 달리, 주권국으로 도약하겠다는 국내의 여망은 들끓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신탁통치에 대한 반발이 잇따르자 미국은 현대의 기무사 조직과 유사한 '방첩대'를 조직해 남한에서 활동 중인 공산주의자, 즉 전·현직 남로당 당원들을 색출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방첩대 소속으로 남로당에 들어간 첩자들도 있었다. 이들의 정체는 그들의 아내와 방첩대만 알고 있을 정도로 일급비밀에 속했다. 미군정은 전쟁 전부터 북한과 첩보전을 벌이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런 가운데 한국전쟁이 발생했다. 북한이 남진했다가 다시 남한이 북진하는 상황이 연출됐고, 그 과정에서 '전쟁 포로'가 생겼다. 미군은 '전쟁 포로'를 남로당원이나 빨치산 대원과 다름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의 면면은 제각각이었다.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와 신탁통치기, 내전 등을 거치며 살아 나가기 위해 수많은 변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첩자가 되기도 했고, 인민군이 될 수도, 국군이 될 수도 있었다.
X
주민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지역을 보수하는 사진./ 사진=연합뉴스
미국 위스콘신대 역사학과의 모니카 김 교수가 쓴 '심문실의 한국전쟁'(후마니타스)은 포로 심문실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한국전쟁을 분석한 학술서다. 책은 구한말부터 시작해 한국전쟁까지 영향을 준 식민주의의 잔재가 어떻게 한국인의 내면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조명한다. 저자는 거제도 유엔군 포로수용소에서의 심문 기록, 미군 방첩대가 실시한 심문 자료 등 방대한 자료를 분석해 내전 양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책에 등장하는 서울대생 오세희의 사연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다단했는지를 드러낸다. 오씨는 전쟁 중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네 가지 다른 문서를 챙겼다. 학생증, 교사자격증, 유엔군이 살포한 귀향증, 인민군이 발급한 애국자증명서다. 귀향 도중 국군이나 인민군 모두를 만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국군을 만났으나 이 모든 준비(문서)가 무용지물이 됐다. 그는 거제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X
가서 보니 포로들의 면면이 제각각이었다. 피란을 못 가고 인민군이나 치안대에 끌려가 일하다 붙잡힌 민간인, 인민군에 강제 편입됐다가 국군과 싸우다 포로가 된 의용군, 인민군의 포로가 되어 이북으로 끌려가다가 진격하던 미군에게 다시 잡힌 전직 국군, 미군에 생포돼 언어불통으로 인민군으로 간주된 국군 패잔병, 피란 중 고의나 실수로 포로 무리에 끼어든 민간인이나 간첩으로 오인돼 체포된 민간인 등이다.
저자는 오씨 등의 사연을 분석하며 한국전쟁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해하려면 전장에서 벗어나 심문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장군이나 용사가 아닌, 엄혹했던 그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 때로는 비겁함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보통 사람'을 주목해서 서술해 나간다.
X
평양 포로수용소./ 사진=연합뉴스
저자는 포로들의 사연을 통해 더 넓은 틀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의 삶에는 식민주의, 반공주의, 신탁통치 등 도도한 역사의 물결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공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기존의 냉전 이분법으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불충분하며, 오히려 식민주의, 주권, 인정(승인)의 문제가 한국전쟁의 전장에서 훨씬 더 핵심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니카 김은 이 책으로 2022년 맥아더펠로십, 2021년 제임스팔레상, 미국외교사학회 2020년 스튜어트 버나스 도서상 등을 수상했다.
X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쓴 '마을로 간 한국전쟁'(돌베개) 역시 제51회 한국출판문화상과 제24회 단재상을 받은, 한국전쟁을 다룬 저명한 학술서다. 저자는 모니카 김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인물들의 서사가 아닌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펼치는 미시사(微視史)에 주목했다. 한국전쟁을 마을 단위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재조명하며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 구조를 파헤쳐 출간 당시 주목받은 책이다. 15년 전에 출간됐으나 이번에 완도와 해남 지역 내용을 추가해서 수정 증보판으로 나왔다.
▲ 심문실의 한국전쟁 = 김학재·안중철 옮김. 512쪽.
▲ 마을로 간 한국전쟁 = 400쪽.